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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탄생

2026-01-23조회수 33
작성자
정지호 지음




량치차오의 국민국가 건설 분투기
중국의 탄생


정지호 지음 | 176×225 | 360쪽 | 무선 | 24,000원
2026년 1월 20일 | ISBN 978-89-8222-816-2 (93910)








책 소개


이 책은 명청사학회 회장을 역임하고 동양사학회와 중국 근현대사학회 회장인 경희대 사학과 정지호 교수가 쓴 량치차오(梁啓超, 1873~1929) 전문 연구서다.

량치차오의 학문과 사상을 본격적으로 조명한 이 책은 량치차오의 역사관, 경제관, 재정관, 제국론, 국성론을 비롯해 근대 국민국가의 기본 요소인 국적법과 중국 동북지역에 거주하던 조선인의 법적 지위 문제까지 체계적으로 고찰한 국내 최초의 책이다.

그동안 량치차오는 ‘입헌군주제를 지향한 보황파(保皇派)’, ‘보수 개량주의자’ 등으로 비판받아 왔지만, 이 책의 저자 정지호 교수는 량치차오의 사상이 매우 과감하고 혁신적이었다고 평가한다. 저자는 량치차오의 사상이 국민국가 건설이라는 시대적 과제를 해결하기 위한 실천의 표현이자 중국 사회의 근본적 변화를 추동하려는 개혁적 시도였다고 강조한다.

근대 중국의 형성 과정에서 량치차오 사상이 갖는 중요성에 비해 그에 관한 학술 연구는 부족한 실정이다. 이런 상황에서 『중국의 탄생: 량치차오의 국민국가 건설 분투기』는 량치차오의 사상에 대한 중요한 안내서일 뿐만 아니라, 중국의 과거와 현재, 나아가 미래까지, 그리고 동아시아의 근대화를 이해하는 지침서가 될 것이다.




출판사 리뷰


량치차오를 통해 근대 중국을 탐구하다

량치차오, ‘천하’에서 ‘국민국가’로 중국을 다시 설계하다
오늘날 우리가 당연하게 여기는 ‘중국’, 즉 광대한 영토, 막대한 인구, 다양한 민족으로 이루어진 중국이라는 국가는 본원적으로 존재했던 것일까? 『중국의 탄생』은 근대 중국의 탄생 과정을 탐구하며 지금의 중국은 19세기 말 근대화의 물결과 열강의 침입이라는 충격 속에서 새롭게 형성된 역사적 산물임을 보여준다. 이 과정에서 저자가 주목하는 인물은 바로 량치차오(梁啓超, 1873~1929)다. 이 책은 ‘천하’와 ‘중심’이라는 관념의 세계에 머물러 있던 중국이 ‘국민국가’라는 새로운 정체성을 구축해 나가는 과정에서 지대한 영향을 미친 량치차오의 사상을 연구한 국내 최초의 전문 연구서이다.

정지호 교수는 그동안 ‘보황파’, ‘보수 개량주의자’ 등으로 비판받아 온 량치차오를 재평가하며, 그의 사상이 지닌 혁신성에 주목한다.

“량치차오의 사상은 매우 과감하고 혁신적이었다. 그가 지향한 새로운 세계는 당시 중국인들이 한 번도 경험해 보지 못한 미지의 영역에 속한 것이었다.” (9쪽)

이 책에서 정지호 교수는 량치차오가 어떻게 ‘중국’이라는 국명을 제안하고, 흩어진 민족과 영토를 하나의 ‘국민’과 ‘국방’이라는 틀 안에서 재구성했는지 살핀다. 량치차오는 ‘중국’이라는 국명을 제안하며 근대 중국의 내셔널리즘이 전통적 화이(華夷)질서와 단절하면서도 이를 계승하는 이중적 특성을 가진다. 저자는 이를 “전통의 발명이자, 근대적 재구성의 한 사례”라고 강조한다.

또한 량치차오는 중국의 국토를 행정적 중심부와 주변부로 나누되, 만주·몽골·티베트·신강 등 청조의 확장 영역을 하나의 일체적 국토로 파악함으로써 전통적 판도를 근대적 영토 개념으로 전환하였다. 더 나아가 그는 국적법 제정, 재정 개혁, 세제 정비, 화폐 제도와 은행 설립 구상 등을 통해 ‘백성’이 아니라 ‘국민’을 전제로 한 국가 운영의 틀을 마련하고자 했다. 량치차오의 연방제론이나 제국론 역시 전통적 질서의 붕괴 이후 중국을 어떤 정치적 형태로 재구성할 것인가라는 문제의식에서 비롯된다.

량치차오는 20세기를 ‘국민 경제의 경쟁 시대’로 규정하며, 국가의 존망은 군사력이나 왕조의 정통성이 아니라 국민경제의 역량에 달려 있다고 보았다. 이는 도덕과 문명을 중심으로 국가를 이해해 온 전통적 세계관을 근본에서부터 뒤흔드는 인식 전환이었다.

그의 경제·재정 개혁론은 단기적 처방이 아니라, 국민을 경제 주체로 상정한 근대 국가 구상의 일부였다.

나아가 량치차오는 신해혁명 이후 ‘국성(國性)’이라는 개념을 통해 민족과 국가의 관계를 다시 사유하고, 공자의 사상을 재해석함으로써 전통을 배제하지 않으면서도 새로운 국민 통합의 원리를 만들고자 했다. 전통의 재구성을 통해 근대를 사유하고 새로운 국가 질서의 윤리적 기반을 모색하려 한 량치차오는 근대화가 곧 서구화라는 도식에 균열을 낸 혁신적 사상가였다.

량치차오의 다방면에 걸친 제안들은 당대 정치 현실 속에서 온전히 실현되지는 못했으나, 중국이 국민국가로 이행하는 과정에서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반복적으로 호출되는 사상적 자원이 되었다는 점에서 역사적 의미를 지닌다.

“오늘날 중국은 개혁과 개방으로 인한 경제성장을 통해 세계 정치‧경제 질서의 중심으로 급부상하고 있으며, 인민의 생활수준은 과거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향상되었다. 그러나 지역 간의 불균등한 경제발전과 빈부격차는 심각한 사회문제로 부각되고 있으며, 갈등은 사회 전반에 걸쳐 확산되고 있다.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중국 정부는 ‘중화민족론’을 통해 이론적 재무장을 시도하며, 국가주의를 여느 때보다 강조하고 있다. 이는 량치차오가 생애를 바쳐 추구했던 강력한 국민국가 건설 프로젝트가 지금도 진행 중임을 보여주는 것이 아닐까? 중국의 국민국가 건설은 여전히 현재진행형의 과제로 남아 있다.” (50쪽)

중국 근대화의 선구자 량치차오를 읽어야 하는 이유
이 책은 량치차오의 근대적 역사 서술부터 경제·재정 개혁안, 그리고 중화민족의 신질서를 모색한 국성론에 이르기까지 총 9장에 걸쳐 그의 전방위적인 사유를 다룬다. 특히 청말 국적법 제정 과정과 개적 화인(改籍華人) 문제, 민국 시기 중국 동북지역, 이른바 만주에 거주하던 조선인의 법적 지위 등 기존 연구에서 소홀했던 역사를 심도 있게 다뤄 학술적 완성도를 높였다.

량치차오는 왕조의 몰락과 외세의 침탈이라는 위기 속에서, 전통을 폐기하지도, 근대를 무비판적으로 수용하지도 않는 제3의 길을 모색했다. 이 책은 바로 그 모색의 궤적을 총체적으로 이해하고, 량치차오의 개혁 방안들이 근대 중국의 발전 과정에서 지닌 의의를 조명한다.

량치차오는 ‘국민’을 자연적·혈연적 공동체로 전제하지 않았다. 그는 국민을 교육과 제도, 경제와 법을 통해 형성되는 역사적 존재로 이해했다. 이는 국민을 단일한 본질로 환원하려는 내셔널리즘의 폭력성과 다른 사유의 가능성을 내포한다. 이러한 관점은 오늘날 민족·국적·이주를 둘러싼 갈등이 심화되는 현실에서 여전히 유효하다.

“량치차오는 근대 국민국가를 건설하는 데 있어 역사의 주체로서 민족을 부각시켰다. 그가 구상한 ‘대민족주의’는 혈통, 언어, 풍속과 같은 객관적 요소를 초월해서 ‘나는 중국인이다’ 혹은 ‘나는 중화민족의 일원이다’라고 스스로 자각하는 ‘민족의식’의 발현을 통해 구현되는 근대적 의미의 민족관념을 제기하였다.”(49쪽)

량치차오는 급변하는 현실을 치열하게 응시하며, ‘한 번도 경험해 보지 못한’ 국가의 미래를 설계한 선구자다. 전쟁의 발발과 극우의 재등장, AI 기술 혁명으로 대변되는 격변의 시대를 사는 우리에게 그의 사상은 나아가야 할 방향과 사유의 실마리를 제공한다. 이것이 바로 『중국의 탄생: 량치차오의 국민국가 건설 분투기』를 읽어야 하는 이유다.

<각 장의 내용>

1장 ‘량치차오의 근대적 역사서술과 국민국가’
량치차오의 계몽적 역사서술에 대한 분석을 통해 그가 지향했던 근대 국민국가의 성격 및 의미를 재조명한다.

2장 ‘량치차오의 경제 개혁안과 국민국가’
량치차오의 경제 개혁안이 중국의 국민국가 형성 과정에서 차지했던 역할과 의미를 정합적으로 조명한다.

3장 ‘량치차오의 재정 개혁안과 국민국가’
량치차오의 재정 개혁안을 세제 문제와 재무행정 개혁에 초점을 맞추어 심층적으로 검토한다.

4장 ‘량치차오의 제국론과 대청제국의 국체’
량치차오의 제국론은 대청제국 체제가 근대적 국민국가로 전환하는 데 필수적인 역할을 했으며, 이는 중국의 근대적 정체성과 관련한 오늘날의 논의에도 많은 시사점을 제공한다.

5장 ‘량치차오의 연방제론과 ‘신중국’ 건설’
량치차오가 구상한 ‘신중국’의 이상과 현실의 괴리를 조명하고, 그가 제안한 연방제론이 국민 통합과 국가 건설 과정에서 가지는 의미를 재평가한다.

6장 ‘량치차오의 국성론과 중화민족의 신질서 모색’
신질서의 구체적인 내용과 의미를 고찰하며, 량치차오의 사상이 현대 중국의 정체성과 국가적 비전에 제공하는 함의를 논의한다.

7장 ‘청말 국적법 제정과 국민의 경계’
국적법 제정과 국민의 경계 확정, 1909년 공포된 중국 최초 국적법의 제정 배경과 의의를 검토한다.

8장 ‘청말 개적 화인의 귀속과 국민의 경계’
청말 개적 화인 문제가 단순한 국적 변경의 문제가 아니라, 청조가 근대 국민국가로 전환하는 과정에서 국민 경계 확립이라는 중대한 과제와 맞물려 있었음을 밝힌다.

9장 ‘민국 시기 동북지역 조선인의 법적 지위’
민국 시기 동북지역 조선인의 법적 지위 문제를 다각도로 조명함으로써, 당시 동아시아 국제질서 속에서 민족과 국가의 경계가 어떻게 작동했는지 살펴본다.




차례


서장 ‘천하’에서 ‘국민국가’로

1장. 량치차오의 근대적 역사 서술과 국민국가
머리말
중국의 창출과 국민 양성
단선적 역사발전론을 통한 중국사의 재구성
국민국가 건설을 위한 역사의 역할
맺음말

2장. 량치차오의 경제개혁안과 국민국가
머리말
세계 경제에 대한 인식 변화
국민 경제 구축을 위한 방안과 정책
맺음말

3장. 량치차오의 재정개혁안과 국민국가
머리말
재정 문제에 대한 인식
세제개혁안
재무행정(財務行政)의 개혁
맺음말

4장. 량치차오의 ‘제국(帝國)’론과 ‘대청제국(大淸帝國)’의 국체
머리말
량치차오의 신체제 모색과 제국론
대청제국 국체 형성의 기반
대청제국의 국민 창출과 국민 통합의 원리
맺음말

5장. 량치차오의 연방제론과 신중국 건설
머리말
대일통(大一統) 관념에 대한 반발과 연방제 소개
국가 유기체설과 연방제의 비판적 수용
신중국 건설의 이상과 현실
맺음말

6장. 량치차오의 ‘국성(國性)’론과 중화민족의 신질서 모색
머리말
국성의 제기와 중국불망론(中國不亡論)
공자의 재해석과 중화민족의 신질서 모색
맺음말

7장. 청말 국적법 제정과 국민의 경계
머리말
화교 보호와 국적법 문제의 제기
화교 국적 문제를 둘러싼 네덜란드 정부와의 교섭
네덜란드의 국적법 반포와 청조의 대응
국적법의 내용 및 그 의의
맺음말

8장. 청말 개적 화인(改籍華人)의 귀속과 국민의 경계
머리말
개적 화인의 실태 및 여론 동향
개적 화인을 둘러싼 분쟁과 처리
개적 화인에 대한 청조 정부의 대책
「대청국적조례」의 개적 관련 규정
맺음말

9장. 민국 시기 동북지역 조선인의 법적 지위
머리말
「중화민국 국적법」의 변용
동북지역 조선인의 법적 지위 문제
조선인 귀화자에 대한 일본의 대응
동북지역 조선인의 신분지향
맺음말

참고문헌
량치차오 연보
찾아보기



지은이


정지호(鄭址鎬)

경희대학교 사학과를 졸업하고 동 대학 대학원에서 석사학위를 취득했으며, 도쿄대학 대학원 인문사회계 연구과에서 석사학위 및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현재 경희대학교 사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저서로는 『변혁의 물결―근대화를 향한 동아시아의 도전』, 『합과―전통 중국 상공업의 기업 관행』, 『진수의 『삼국지』, 나관중의 『삼국연의』 읽기』, 『한중 역사인식의 공유』(공저), 『네트워크 세계사』(공저), 『키워드로 읽는 중국의 역사』 등이 있고, 역서로는 『해국도지』[一∼十一](공역), 『안즈민 일기』(공역), 『동북사강』, 『중국근현대사 1―청조와 근대 세계 19세기』, 『애국주의의 형성』 등이 있다.




책 속으로


량치차오는 청말・민초의 격동하는 시대적 흐름 속에서 근대 중국의 ‘국민국가’ 건설을 목표로 정치, 법률, 경제, 사학, 철학, 문학, 교육 등 인문・사회과학 전 분야에 걸쳐 자신의 주장을 전개했으며, 이를 실현하기 위해 일생을 바쳤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의 주장은 ‘경제혁명(經濟革命)’, ‘사학혁명(史學革命)’, ‘시계혁명(詩界革命)’, ‘소설계 혁명(小說界革命)’이라고 일컬어지듯이 당시로서는 매우 과감하고 혁신적인 것이었다. (1장 「량치차오의 근대적 역사 서술과 국민국가」)
-24쪽

량치차오는 근대 국민국가를 건설하는 데 있어 역사의 주체로서 민족을 부각시켰다. 그가 구상한 ‘대민족주의’는 혈통, 언어, 풍속과 같은 객관적 요소를 초월해서 “나는 중국인이다” 혹은 “나는 중화민족의 일원이다”라고 스스로 자각하는 ‘민족의식’의 발현을 통해 구현되는 근대적 의미의 민족관념을 제기하였다. (1장 「량치차오의 근대적 역사 서술과 국민국가」)
-49쪽

량치차오는 서구 자본주의를 비판하면서, 자본 집중에 실패하여 자본주의로 나아가지 못하고 소농사회에 머물러 있는 중국의 현실을 오히려 행운으로 평가하였다. 이는 망명 초기 자본 집중에 집착했던 그의 태도와 비교하면 매우 변화된 모습을 보여준다. 이러한 변화는 그의 많은 경제 관련 글들이 경제학적 관점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정치적 필요를 우선시하는 가운데 집필되었기 때문임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즉, 장기간에 걸친 정치적 상황의 변화에 따라 량치차오의 집필 태도 역시 변화하였던 것이다. (2장 「량치차오의 경제개혁안과 국민국가」)
-92쪽

청말 국가 재정의 위기 속에서 량치차오는 이를 극복하고 국민국가로 나아가기 위해 다양한 개혁 방안을 제시하였다. 그의 재정개혁의 기본 방침은 중앙재정과 지방재정을 명확히 구분하고, 중앙재정을 강화하며, 탁지부를 중심으로 전국 재정을 유기적이고 효율적으로 관리하는 데 있었다. 이를 실현하기 위해 량치차오는 세제개혁을 통해 국가 재정을 튼실히 하고, 나아가 재무행정의 효율화를 통해 예산 낭비를 절감하는 것을 필수적인 과제로 보았다. (3장 「량치차오의 재정개혁안과 국민국가」)
-133쪽

량치차오는 소설을 통해 새로운 국가 체제를 모색하는 과정에서 자신의 정치적 이상을 암시하고자 했던 것으로 보인다. 황제의 퇴위와 총통의 취임이라는 설정은 청조의 유산을 부드럽게 이어가면서도 혁명적인 전환을 담아내려는 그의 복잡한 정치적 구상을 잘 보여준다. 1911년 10월 신해혁명의 발발 이후 대청제국은 량치차오가 바랐던 유신에 의해서가 아니라 혁명에 의해 그 운명을 다하게 된다. 그러나 멸망에 즈음하여 청조가 그동안 판도의 일부에서만 공유하던 ‘중국’과 ‘중화’의 가치를 판도 전체로 확산시키려 했다는 점은 주목할 필요가 있다. (4장 「량치차오의 ‘제국(帝國)’론과 ‘대청제국(大淸帝國)’의 국체」)
-168쪽

량치차오는 루소의 연방제 사상을 처음으로 중국에 소개하며 청말 연방제 논쟁의 단초를 제공하였다. 그러나 이후 미국 방문과 함께 블룬칠리의 정치학설을 접하면서 국가 유기체설에 입각해 입헌군주정체를 지지하게 된다. 량치차오의 입헌군주정체를 위한 노력은 신해혁명 이후 공화정체가 들어서면서 좌절되었지만, 그는 강력한 총통제에 기반한 통일 공화정체를 지지하며 연방제 도입에 대해 비판적인 입장을 견지하였다. 그러나 광활한 제국을 효과적으로 통치하기 위해 연방제의 요소인 지방자치제도의 정식 도입을 주장하였다. (5장 「량치차오의 연방제론과 신중국 건설」)
-202쪽

1912년 오랜 망명생활을 뒤로하고 귀국한 량치차오는 당시 국가 정세가 혼란한 이유에 대해 “국외로부터 물질적・정신적 충격으로 인한 자극을 받았기 때문”이며, 또한 “전통적으로 전해져 온 규범이 점차 사회를 지탱해 갈 힘을 상실하면서 사람들이 방황하고 귀의할 곳을 잃었기 때문”이라고 지적하고 있다. 이러한 혼란스러운 정국을 수습하고 사회를 안정화하기 위해 량치차오는 잡지 『용언(庸言)』의 창간호에 「국성편」을 발표하며 국성론을 처음으로 제기하였다. (6장 「량치차오의 ‘국성(國性)’론과 중화민족의 신질서 모색」)
-209쪽

량치차오가 구상한 천하제일의 제국은 민족주의를 기반으로 한 국가지상주의를 표방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동시에, 그 이면에는 이러한 국가지상주의로부터의 해방 가능성 또한 복선으로 깔려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는 민족주의 국가 건설이 궁극적으로 민족 통합을 넘어 보다 보편적이고 자유로운 국가 질서를 지향하는 그의 이상을 반영한 것으로 평가할 수 있다. (6장 「량치차오의 ‘국성(國性)’론과 중화민족의 신질서 모색」)
-236쪽

청조의 국적법과 시행 세칙은 근대적인 국적 체계를 도입하고, 국적 취득과 이탈의 법적 근거를 마련한 점에서 중요한 의의를 지닌다. 그러나 국적법 시행 이전의 귀화자를 처리하는 방식과 중국 국적 유지 허용 조항은 국민국가의 일원으로서의 일관된 국적 관리를 저해하였으며, 해외 화교의 이중국적 문제를 심화시키는 결과를 초래하였다. 이는 국적법이 근대 국민국가의 법적 기반을 구축하려는 초기 시도임과 동시에, 전통적 요소와 현실적 한계가 혼재된 과도기적 성격을 보여주는 것이라 할 수 있다.
-265쪽 (7장 「청말 국적법 제정과 국민의 경계」)

청말 국민국가 건설의 과제는 주로 입헌파와 혁명파의 대결구도를 중심으로 논의되어 왔다. 입헌파가 입헌군주제를 통해 국민국가 건설을 지향한 반면, 혁명파는 공화혁명을 목표로 했다는 점에서 양측의 접근은 상이하였다. 그러나 양측은 서로 격렬하게 대립하면서도, 강력한 국가주의 담론에 기반하여 국민국가의 건설을 지향했다는 공통점을 공유하고 있다. 더 나아가, 입헌파와 혁명파 모두 청조 국가권력의 외부에 위치하고 있었다는 점도 중요한 특징으로 간과할 수 없다. 따라서 청조의 관점에서 국민국가 건설을 위해 어떠한 대응을 시도했는지를 살펴보는 것은 당시의 정치적・사회적 맥락을 이해하는 데 매우 의미 있는 작업이라 할 수 있다. (8장 「청말 개적 화인(改籍華人)의 귀속과 국민의 경계」)
-271쪽

중국은 광활한 만주 지역을 개척하기 위해 봉금정책을 폐지하고 조선인을 대거 수용하였으나, 한일합방 전후 일본과의 영토 분쟁을 우려하며 조선인의 귀화를 적극 장려하는 정책을 추진하였다. 이로 인해 조선인의 국적 문제를 둘러싸고 일본과 중국 간에 갈등이 발생하였다. 일본은 기본적으로 일본의 국적법을 조선에 적용하지 않음으로써 조선인의 귀화를 인정하지 않는다는 방침을 견지하였다. 이는 조선인의 귀화를 인정할 경우 대규모 이탈이 발생하여 만주 경영에 차질을 초래하고, 독립운동을 전개하던 조선인을 단속하기 어려워질 것이라는 우려에서 비롯되었다. 이러한 정책에서 일본제국은 조선인을 자국의 국민으로 규정하면서도 일본인과는 달리 권리는 부여하지 않고 의무만을 부과하는 이중적 태도를 명확히 드러냈다. (9장 「민국 시기 동북지역 조선인의 법적 지위」)
-337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