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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ocus

‘하벨의 정치철학과 한국의 시민사회’

2016-06-01 교육

박영신 교수, 미원렉처에서 하벨의 ‘실천 도덕의 정치’ 재조명
“먹고사는 것 넘어 진리 추구 위한 ‘초월’의 개념이 절실하다”

“정치는 이데올로기나 이념이 아니다. 정치는 목적이 수단을 정당화하는 행위도 아니다. 정치는 세계를 책임지고자 하는 개인의 도덕에 근거한다.” 故 바츨라프 하벨 전 체코 대통령(1936~2011)은 실천 도덕으로서의 정치를 구현한 현실정치인이었다. 경희대학교는 지난 5월 16일(월) 네오르네상스관 네오누리에서 하벨의 생애와 사상을 재조명하면서 시대가 필요로 하는 인간과 정치, 문명의 새로운 가능성을 모색하는 ‘미원렉처’를 개최했다.  

하벨은 극작가이자 시민운동가로 체코의 무혈 민주혁명인 ‘벨벳혁명’을 이끌고, 탈공산화 이후 체코슬로바키아의 첫 대통령을 지냈으며, 1993년 체코와 슬로바키아가 분리된 이후 체코 대통령으로 재신임 됐다. 하벨은 지성인으로서 가진 고뇌와 도덕, 양심을 현실정치에서 지켜냈다. 정치는 정치인들만의 권력투쟁이 아니라, 모든 시민에게 열려 있다고 생각한 그는 시민적 공감과 연대를 통해 시대가 원하는 열린 정치의 가능성을 찾아 나섰다.

경희는 현실정치의 높은 벽에 맞서 시민과 정치의 새로운 책무를 일깨운 하벨의 실천 활동이 학문과 평화의 전통 속에 더 나은 인류의 미래를 추구해온 경희의 철학에 부합하다고 판단, 지난해 ‘Peace BAR Festival’에서 하벨에게 명예 평화학 박사학위를 수여한 바 있다.

하벨, 아래로부터의 관심 ‘힘없는 자의 힘’ 강조
미원렉처는 국내외 석학, 전문가, 실천인을 초빙, 인간과 세계, 문명의 발전방향에 대한 견해를 나누는 특별강연이다. 미원렉처의 ‘미원’은 경희학원 설립자 故 조영식 박사의 호 ‘미원(美源)’에서 가져온 것이다. 이번 미원렉처에서는 박영신 연세대 사회학과 명예교수가 초청됐다. 강연 주제는 ‘하벨의 정치철학과 한국의 시민사회’였으며, 강연에 이어 원탁회의, 질의응답이 있었다.

박영신 교수는 하벨의 정치철학이 탄생한 배경에 대한 이야기로 강연을 시작했다. 1970년대 이후 공산당은 이전의 공포정치 대신 상부에서 시키는 대로만 하면 큰 탈 없이 모두가 먹고살 수 있는 체제를 채택했다. 최소한의 생활과 안락을 보장받는 대가로 사람들은 진실한 삶에 대한 책임감과 진리에 대한 분별력을 내동댕이치고 체제에 복종하는 삶을 이어갔다. 하벨은 당시를 ‘후기 전체주의’라 지칭하며 ‘거짓 안에서의 삶’을 비판했다. 공산당이 만들어낸 체제에 저항하고, ‘진리 안에서의 삶’을 강조하는 글을 썼다.  

그 가운데 하나가 1979년 발표된 에세이 <힘없는 자의 힘(The Power of the Powerless)>이다. 상층에 있는 권력자 ‘힘있는 자의 힘’의 강압을 통해 모든 국민에게 복종의 의무를 지도록 하는 전체주의를 극복하기 위해 아래로부터의 연대, 즉 ‘힘없는 자의 힘’의 중요성을 강조한 것이다. 

“모두가 물질 획득에 휩쓸려 그 너머 정신의 충만함을 내버리고 있다”
박영신 교수는 ‘후기 전체주의’와 오늘날의 자본주의 사회가 크게 다르지 않다고 지적했다. 그는 “정치가 전문가에 의해 운영되고, 권력이 관료에 의해 조정되면서, 모두가 물질 획득의 일상에 휩쓸려 그 너머 정신의 초월성을 외면한 채 살아가고 있다”고 말했다. 이것이 현실 문명에 저항해온 하벨의 정치철학이 오늘날 재조명돼야 하는 이유다.

하벨은 인간이 만들어 놓은 체제는 그 어떤 것이든 불완전하다고 판단하고, 지역과 국가 그 모든 경계를 넘어서는 보편적 책임감, 현존하는 것 위의 어떤 것에 대한 더욱 높은 책임감을 되살리지 않고서는 답답한 삶의 늪에서 벗어날 희망은 없다고 주장해왔다. 먹고사는 것을 넘어 진리 추구를 위한 ‘초월’의 개념을 강조한 것이다.

박영신 교수는 “과연 오늘날 얼마나 많은 사람이 먹고사는 문제가 아닌 진리, 초월의 문제에 관심을 기울일까?”라는 질문을 던지며, “모든 문명과 문화 속에서 진리와 초월에 대한 관심이 짓밟히고 있다”고 말했다. 그는 현실 문명을 해결할 수 있는 근거로 철학자 야스퍼스의 ‘굴대 문명’(Axial Civilizations)을 제시했다. 동시다발적으로 일어난 굴대 문명은 초월을 인정하고 있었고, 여전히 모든 문명권 정신의 저류를 이루고 있기 때문이다. 그는 “굴대의 초월성을 다시 끌어들여야 한다”면서 “진리는 현실에서 정답이라고 생각하는 것 너머의 세계를 바라보는 초월의 세계다”라고 강조했다.

“언제까지 시민은 정치판을 탓하면서 뒤로 물러나 구경만 할 것인가?”
박영신 교수는 한국 현실정치에 대한 비판과 함께 시민사회의 역할에 대한 생각을 이어갔다. “당이 위기를 맞으면 개혁의 피를 수혈하겠다면서 외부에서 새로운 정치인을 영입하는데, 진리를 추구하는 사람이 아니라 책사만 영입한다. 여전히 권모술수뿐이다”라고 꼬집었다.

그는 “언제까지 시민은 정치판을 진흙탕 싸움이라고 탓하면서 뒤로 물러나 구경만 할 것인가?”라고 반문하며 “시민사회가 진흙탕 정치를 바꿔야 한다”고 말했다. “우리 정치가 하벨이 말하는 실천 도덕의 정치를 감당하기 어려워보여도 정치에서 자신의 삶을 분리시키거나 퇴거해서는 안 된다. 선거철에만 반짝하는 관심과 참여가 아니라, 항상 정치권을 예의주시하면서 도덕, 진리, 초월에 관심을 갖는 시민사회를 만들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하벨의 실천 도덕으로서의 정치는 우리에게 도전이다”
원탁회의에서는 박영신 교수와 최장집 고려대 명예교수, 도종환 더불어민주당 국회의원(시인), 배명복 중앙일보 논설위원 등 학자, 정치인, 언론인이 모여 한국 정치의 미래에 대해 논의했다. 사회를 맡은 이택광 글로벌커뮤니케이션학부 영미문화전공 교수는 “하벨의 정치철학이 한국 정치에 어떤 의미를 가질 수 있는가?”라고 첫 번째 질문을 던졌다.  

박영신 교수는 “얼핏 보면 다양한 배경을 가진 자들이 정치판에 모여 있는 것 같고, 이들 가운데는 실천 도덕의 정치를 구현할 세력이 나올 법도 하지만, 정치 세계에 들어선 이상 술수와 책략을 하루속히 익혀야 한다는 듯이 다른 관심과 가치를 잘라내 버린다. 그런 면에서 하벨의 실천 도덕으로서의 정치는 우리에게 도전이다”라고 말했다.

시인인 도종환 의원은 “총선에 출마해 선거운동을 하면서 하벨이 추구했듯이 책임윤리를 구현하는 정치를 하고 싶다고 했더니 돌아오는 질문은 ‘지역경제는 어떻게 살릴 것인가?’였다”며 모든 것이 경제에 함몰돼 버린 현실에서 하벨과 같이 자기 정체성을 잃지 않고, 현실정치에 구현해내는 것이 큰 과제지만, 이를 실현하는 정치인이 늘어나면 정치의 변화를 기대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탐욕의 진흙탕 정치판, 시민이 함께 만나는 열린 마당이 돼야”
이택광 교수는 “4·13 총선에서 나타났듯이 시민사회는 정치판이 진흙탕이라고 분개하고 있지만, 문제 해결을 위한 주체는 누가 돼야 하는지와 같은 근본적인 논의가 없다”면서 패널들에게 “누가 문제 해결의 주체가 돼야 하는가?”라고 질문했다.  

최장집 교수는 “정치인, 시민, 지식인 등 어느 한쪽에만 너무 많은 도덕적 소임을 요구하면 안 된다. 도덕적으로 높은 의식을 갖는 정치인, 각성된 시민과 지식인 모두 주체가 돼야 한다”고 말했다.

박영신 교수는 “탐욕의 진흙탕 정치판이 공공의 선을 위해 시민과 함께 만나는 열린 마당이 되어야 한다”고 밝혔다. “이럴 경우 시민에게 과도한 도덕성을 갖도록 한다는 우려가 있을 수 있지만, 진정한 시민사회라면 그 역할이 무겁다고 지식인에게만 맡겨둘 것이 아니라, 함께 책임을 져야 할 것이다”라고 강조했다. 

원탁회의에서는 정치를 변화시키기 위해 시민다움을 키워내는 교육과 함께 언론의 역할이 중요하다는 의견도 제시됐다. 배명복 논설위원은 “오늘날의 언론 역시 정치와 마찬가지로 시청률, 구독률과 같은 것으로 존속할 수밖에 없는 측면이 있다”고 지적한 뒤, “문제의 본질을 파악하려는 노력이 없다면 한국 정치를 바꾸는 데 한계가 있을 것”이라며 “앞으로 언론이 도덕적인 근본 문제 의식을 갖고, 이것이 현실 속에서 작동될 수 있도록 함께 노력해야 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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